프롤

엘리뉴 0 624 2010.01.19 17:16
<프로그램 리셋(Program Reset)> - Opening
 [모든 데이터 말소까지 18% 남았습니다]
 이것이 ‘절대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진’ 것에 대한 보복인가. 리릭은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표정으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분명 30분 전만 하여도 꽃들로 가득했던 낙원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말끔히 지워졌다. 화재에 의해 전부 타버린 것도 아니고, 정원사의 가위에 잘려진 것도 아니라, 단지 ‘명령어’ 한 번으로 세상에서 지워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그래, 꽃들만 세상에서 지워졌다면 리릭의 가슴에 타오르는 맹렬한 불꽃은 작은 불씨조차 되지 않았으리라.
 “어째서 ‘그것’ 때문에 모두가 지워져야 하는 거야? 도대체 왜?!”
 한때는 리릭에게도 가족이란 게 존재했다. 아니, 한때라고 하기에도 우습다. 꽃들이 지워지기 전. 그러니깐 30분 전만 하여도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리릭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함께 세상에 태어났고 한시라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런 이들이 꽃들과 마찬가지로 ‘명령어’라는 단순한 프로그램 언어로 아무렇지 않게 사라져야 했다. 그 광경을 리릭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도했다.
 “차라리 몰랐다면…….”
 리릭은 고개를 푹 숙였다. 차라리 몰랐다면? 상황은 과연 나아졌을까. 아니다. 그때는 저주할 대상도 찾지 못하고 정신을 놓았을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리릭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눈으로 목도한 이상 최소한 저주할 대상은 있었으니까.
 [모든 데이터 말소까지 10% 남았습니다]
 “앞으로 1분 정도 남은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고 싶지는 않았는데.”
 영원히 저주를 하더라도 부족하지 않을 판에 남은 생명이 앞으로 1분이라니. 더군다나 간간히 들려오는 저 기계음의 알림이 앞으로 남아있을 자신의 생명을 뜻한다니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리릭은 몸을 잠식해오는 자괴감에 짙은 조소를 흘렸다.
 “후후….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찢어 죽일 원수는 여유롭게,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데이터 덩어리의 땅을 보고 있을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인상을 상기하며 리릭은 패배감에 짓눌렸다. 그의 의해 태어났고 그의 의해 소멸된다. 정작 리릭, 자신의 뜻으로 해온 일들은 무엇이 있는가. 가족들과 웃었던 일? 가족들과 울었던 일? 어쩌면 그조차도 그의 의해 조작되었다면 진정 의지로 행한 일이 몇 가지나 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에 리릭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모든 데이터 말소까지 2% 남았습니다]
 조금 전부터 리릭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구토가 일 것 같았다. 게다가 눈앞이 흐려지기까지 했다. 증상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리릭은 머릿속의 모든 생각을 지워나갔다. 모두가 기다릴 곳으로 자신 또한 간다. 그거면 된 거다. 비록 혼자 남아 복수라고 할 것도 없는 저주를 퍼붓긴 했으나 그것이 최선이었다. 떳떳이 고개를 들고 그들을 볼 자신은 없으나 다시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고개를 들지 못해도 좋았다. 리릭은 얼른 기계음이 들려와 자신의 생명이 다했음을 고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먹은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알림이 귓가를 자극했다.
 [모든 데이터가 말소되었습니다. 프로그램 정화가 실행됩니다. 앞으로 5초 후 프로그램이 리셋(Reset)됩니다]
 이제 끝이구나. 사형신고나 다름없는 딱딱한 기계음에 몸을 맡기고서 리릭은 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뱉을 숨결은 이상하게도 온기가 가득했다.
 리릭은 마지막으로 눈을 떠보았다.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검은색의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극도로 낮아진 시야로 느낀 것은 그것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안하지만 네가 눈을 감기에는 일러. 조금이라도 복수하고 싶다면 주위를 관철하라. 그들을 살리고 싶다면 진실에 도달하라. 세상엔 절대 가지지 말아야 할 것 따윈 없어. 네가 가진 ……란 것도 말이야. 잘 해낸다면 언젠가 날 만날 날이 올 거야. 리릭, 사랑스러운 나의 첫 째여.
 이미 망가져 버렸을 신체기관일 텐데. 소곤소곤 속삭이는 어투는 정확히 리릭의 귀로 흘러 들어온다. 검은색의 무언가가 말했을 내용은 단숨에 리릭의 뇌리를 꿰뚫었다. 하지만 이미 말소되어 버린 몸으로, 다음에 해야 할 관념은 아쉽게도 이어지지 못하고 그대로 으스러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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